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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수상(漆谷 隨想) 칠곡은 팔거현(八莒縣)으로부터 시작된다. 1640년경 소도읍 현에서 도호부(군위.의흥. 신녕. 하양의 4개현을 관장)로 승격되면서 칠곡이라 명명 되었고, 다시 분리되면서 군(郡)으로 남아 지금에 이르렀다. 대한제국 말기로 거슬려 올라가 보자. 세계열강은 약육강식의 큰틀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한 팽창정책에 몰두했고, 저들의 잘 짜여진 신질서 구도는 지정학적 약소국 한반도를 존립의 위기로 몰아갔다. 이와 함께 밀려든 서구 물질문명은 5천년 잠 들어 있던 은둔의 나라에 신지식을 받아들이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왕조시대의 사회적 배경은 사·농·공·상의 계급구조에 8천(賤)의 하층민(사노비, 승려,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기생, 공방장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뿌리 깊은 반상의 구분으로 궁핍과 문맹률이 80%를 웃돌았다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시대적 환경은 교육만이 절대가치가 되게 했다. 해방과 함께한 영(榮)과 욕(辱)은 숨고를 겨를 없이 달려왔다. 한편 지금의 칠곡중학교의 태동도 눈물겹다. 칠곡향교 명륜당을 교무실로 하고 교사와 학생들이 3년여에 걸쳐 흙벽돌을 직접 찍으면서 세웠다 하니 배움에 목마른 세대의 처절함이 아니었으면 과연 가능했을까? 이렇게 소도읍은 근대의 칠곡으로 거듭나게 되고 과거를 잊은 듯 현대를 맞으면서 대구라는 거대 블랙홀에 흡수되는 운명을 맞는다. 그 옛날 목가적 촌락은 풍경화로만 남게 되었고 다행히 한껏 높아진 삶의 질은 오뉴월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어야 했던 세대로서, 지금 마음껏 누리고 있는 갖가지 문화혜택조차 배부른 자의 호사(豪奢)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학정동, 내서, 천서, 대천, 태전동에 산재해 있던 사과밭하며 구릉지 정지작업을 위해 형체도 없이 밀어버린 말산은(지금의 청암타운 일대) 지역의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손치더라도 개발지 한 켠에 비켜져 있던 함지산 끝자락의 선사시대 고분군마저 마구 파헤치고 그냥 덮어버린 아파트 행렬은 때로는 볼성사납기까지 하다. 이렇게 졸속 처리되어 얻은 불과 수천 수만평의 택지는 지나친 표현일지 몰라도 선대에겐 불경(不敬)이요, 후세에게는 무책임한 난개발이 아닌가 한다. 당시 발굴된 유물이 공공박물관에 보존 전시되고 있다고는 하나 한번 망가뜨린 문화유산은 그 생명력을 잃은 탓에 어떤 형태로 복원을 한다 해도 이미 퇴색된 원형의 의미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하겠다. 금호강변 둔치도 마찬가지다. 강변에 늘어 선 밤나무 숲은 학생들의 봄·가을 소풍처로, 또 여름철 등짐 진 길손들이 땀을 훔치던 휴식처로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개발논리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자연적이던 인위적이던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그냥 생긴 말이 아님을 다시 한번 실감케 한다. 잠든 칠곡의 역사를 일깨워라. 묻혀있는 과거사는 세상 밖으로 끄집어낼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법, 허나 어디 말이 쉬워 100년이지 3대, 4대를 거슬려 올라 파헤쳐야 하는 일이 어찌 그리 말처럼 쉬운가? 그렇지만 각종 역사자료는 증언하고 있다. 조선왕조 선조 제위 25년 정유재란 당시 파병온 명나라 장수 유정의 최남단 군진이 향리였다는 것도 상기할 필요가 있으며, 임진왜란 후 가산산성 축조때 재미있는 일화도 음미할 만하다. 신라 말 도선비기로 풍수지리설을 도입한 도선선사는 가산의 산세가 화기 왕성한 지세임을 간파하고 이를 억누르기 위해 산정 개산암 바위틈에 쇠말뚝으로 철마 · 철우 형상을 묻어 두었는데 축성을 하면서 뽑아 버렸다고 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후대의 어느 술사가 이곳이 강한 화기로 인한 가뭄으로 고통 받을 것이라며 탄식했다는 야사를 칠곡지는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대구 분지가 여름에는 유난히 덥고, 겨울에 더욱 추운 곳이 아니던가.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여 타임캡슐을 타고 400여년 역사를 거슬러 오르기 위해 팔거역사문화연구회가 발족했다. 그리고 연구회가 뜨는 첫 삽으로 칠곡도호부 복원을 구체화 하고 있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칠곡향교에 전통문화체험관을 짓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인성교육을 활성화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이렇게 누대에 걸쳐서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으며 이것은 결코 잊어서도, 왜곡해서도 안되는 살아있는 증거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현실이 후대에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누가 뭐라 하든 과거나 미래에서나 칠곡은 칠곡일 따름이다. ⊙ 칠곡향교 총무수석장의 강진일 |